평화의 수사 뒤에 숨은 정치: 교황청의 이중적 행보
수십 년간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그림자 전쟁'이 지속되어 온 중동에서, 2025년 6월의 군사 충돌은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고조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선제 공습과 이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보복은 중동 정세를 예측 불허의 혼란으로 몰아넣었으며, 국제사회는 사태 악화를 우려하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로마 교황 레오 14세는 사태 발생 다음 날인 6월 14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연설을 통해 분쟁 당사국들에게 자제를 촉구했습니다. 교황은 "책임과 이성을 강력히 호소하고자 합니다"라며 "누구도 타국의 존재를 위협해선 안 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핵 위협 없는 안전한 세계를 위한 "존중에 기반한 만남과 진실한 대화"의 중요성 또한 역설했습니다.
교황의 이러한 중립적인 수사는 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명분이 높지만, 그 이면에는 교황청의 고유한 정치적 계산과 한계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과연 교황청의 '평화'는 진정한 윤리적 소명일까요, 아니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일까요?
'도덕적 중립'인가, '선택적 침묵'인가?
교황의 발언은 핵무장을 둘러싼 현 사태에서 어느 일방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양측 모두에 자제를 촉구하는 '중립적인' 어조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적 수사는 그 한계 또한 분명합니다. 첫째, 교황은 분쟁의 원인이나 공격의 주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의 도의적 등가론을 펼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충돌이 촉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해당 공격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규탄하지 않았습니다. "타국의 존재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언명은 일견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정작 누구의 행동이 그러한 위협을 가했는지 분명히 지적하지 않음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도덕적 모호성은 전쟁으로 고통 받는 희생자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러시아의 침공을 직접 거명하지 않은 채 추상적으로 평화만을 호소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발언에서도 교황은 이스라엘과 이란 모두에 똑같이 "책임과 이성"을 주문했지만, 정작 핵시설 폭격이라는 군사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회피했습니다. 이는 교황청이 국제 분쟁에서 정의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지 못하고 외교적 중립 뒤에 숨음으로써 도덕적 권위에 손상을 입히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입니다.
둘째, 교황청 특유의 외교적 중립 노선은 분쟁 해결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교황의 언어는 도덕적 권위에 호소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바티칸은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강제 수단이 전무하며, 오직 도의적 설득력에 의존해 국제 무대에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란 충돌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한 분쟁에서, 도덕적 권고만으로 당사국들의 행동을 바꾸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교황의 호소 이후에도 양측의 무력시위는 계속되었고, 국제사회가 가시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그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공산이 큽니다.
선택적 개입과 이중 잣대: 교황청의 숨겨진 외교 전략
교황청의 이러한 중립 기조와 행보는 이번만의 일이 아니며, 과거 중동 및 국제 문제 대응에서도 선택적 개입과 이중 잣대의 모습이 드러나곤 했습니다. 바티칸은 표면적으로는 전쟁과 폭력에 대해 일관된 "평화주의" 원칙을 견지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실제 개입 방식이나 목소리의 크기는 사안에 따라 들쭉날쭉했습니다. 특히 자국 교회나 외교적 이익이 걸린 사안에서는 평소의 도덕적 엄격함이 눈에 띄게 누그러지는 이중적 태도가 관찰됩니다.
한 가지 예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교황청의 태도를 들 수 있습니다. 교황청은 이 분쟁에서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하며 팔레스타인 국민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입장을 천명해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자 지구 민간인들의 고통을 여러 차례 언급했고, 폭력 종식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바티칸은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하여,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신중하거나 우회적인 표현만을 사용했습니다. 2023년 가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당시 교황은 "모든 폭력의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고 말하며 휴전을 촉구했지만, 이스라엘의 가자 폭격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집단학살"로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팔레스타인 측이 겪는 극심한 고통의 현실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반면 이란이 호전적 수사를 내뱉을 때는 이란 지도부의 발언을 은연중에 문제 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는 등, 상대에 따라 미묘하게 수위 조절을 하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결국 교황청은 중동 문제에 있어서 보편 윤리의 목소리와 현실 외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고, 이 과정에서 일관성의 결여라는 비판을 자초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교황청이 강대국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반응을 보여 온 점입니다. 예컨대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탄압, 홍콩의 민주화 시위 탄압 등에 대해 국제사회가 규탄 목소리를 높일 때, 바티칸은 거의 언급을 삼가거나 원론적인 대화 촉구에 그쳤습니다. 심지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이후 중국 정부와 맺은 교회 협약을 이유로 달라이 라마조차 만나지 않았는데, 이는 중국을 지나치게 의식한 처사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반면 서방 진영 국가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날카롭게 사회윤리적 비판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가령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럽과 미국의 무기 산업이나 이민자 정책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비판을 표명하면서도, 동맹을 기대하는 중국이나 중동의 절대군주국 인권 문제에는 거의 침묵했습니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교황청이 지향하는 보편 윤리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권위의 선택적 적용이라는 오명을 남겼습니다.
교황 레오 14세의 중립적 발언은 평화를 바라는 선의에서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 쟁점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추상적 원칙에 머뭄으로써 현실 정치의 장벽 앞에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황청은 '평화'라는 고귀한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외교적 이익과 이미지 관리에 무게를 두는 정치적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맞서고 약자의 편에 서는 용기 있는 실천에서 비롯됨을 교황청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