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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보여주기식' 자선: 샤워실이 감춘 진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이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황', '거리의 교황'이라는 별칭과 함께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 인근에 노숙인을 위한 샤워시설과 이발소, 쉼터를 마련한 사례는 언론에 널리 보도되며 그의 파격적 자비 행보의 대표적 상징으로 소비되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이를 "예수의 정신을 회복한 혁신"이라 평하며 수많은 이들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자비의 상징'은 진정한 구원으로 이어졌을까요? 노숙인들의 삶은 정말로 달라졌을까요? 바티칸이 만든 그 '상징', 고통 받는 이들의 절망을 실질적으로 바꾼 적이 있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 대답은 '아니오'에 가깝습니다. 그 샤워실은 기껏해야 냉수마찰을 허락한 교황의 연민을 연출하는 무대였을 뿐, 교회가 말하는 '구원'이나 정의의 회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상징은 진실이 아니다: 단발성 구호의 한계

 

언론은 교황의 작은 움직임을 확대 보도하고, 그를 영웅처럼 조명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 뒤에는 종종 실질적인 개선 없는 상징 조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샤워실 설치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샤워와 숙소,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 시도 자체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구조적 해결책'과는 거리가 먼, 단발적인 구호 조치에 불과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교황이 샤워실을 만들면서 동시에 그들을 구원한다는 인상을 주려 했다는 점입니다. 미사에서, 기자회견에서, 바티칸은 지속적으로 '노숙인과 함께하는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함께함'은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행위에 머물렀습니다. 노숙인의 자립을 위한 정책, 주거 권리 보장, 국가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통한 복지 네트워크 구축 등 현실적인 개선책은 전무했으며, 오히려 그들의 삶은 카메라 뒤로 사라진 채 방치되었습니다.

 

고통을 소비하는 종교의 모순적 행태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자선 행위가 '자신의 성스러움을 포장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점입니다. 바티칸은 샤워실을 통해 교황의 청빈함과 따뜻함을 강조했지만, 정작 교회 내부의 성범죄 은폐, 재정 비리, 권위주의적 구조는 방치되거나 무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노숙인의 고통은 교회가 자신의 도덕적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활용된 연극적 소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종교의 오래된 악습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불교에서, 이슬람에서, 기독교에서 종종 가난한 자는 '도와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도와줌으로써 내가 선해지는 도구'가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은 그 구조를 전례와 기도 속에서 체계화하고 정당화해 왔습니다. '자선을 행하면 죄가 사라진다'는 교리 속에서, 가난한 이는 언제나 타인을 정화시키는 희생의 도구로 설정되어 왔습니다. 교황의 샤워실은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결국, 누구를 위한 자선이었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교황 자신과 바티칸의 이미지를 위한 것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노숙인의 발을 씻어주고도, 그 발이 다시 길거리로 향하게 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동정에 불과합니다. 교황이 진정으로 노숙인을 사랑했다면, 왜 바티칸 은행의 부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왜 수도원 소유의 빈 건물을 열지 않았을까요? 왜 바티칸이 직접 노숙자 자립 센터를 설립하지 않았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교회는 희생 없이 자선을 말하고 싶었고, 변화 없이 감동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상징을 넘어선 책임과 변화를 요구하며

 

결국, 교황의 샤워실은 가난한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바라보는 이들을 위한 장치였습니다. 언론에 비친 따뜻한 이미지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실질적인 변화 없이 반복되는 자선은 체제 유지를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고통을 지속시키고, 그 고통을 성스러운 것처럼 미화하면서, 교회 자신은 여전히 중심에 남아 권위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구조적인 변화가 아닌, 상징적인 도상(圖像)만을 남겨두었습니다. 샤워실, 식사 배급, 이발소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설치한 이 시설들은 어느새 교황의 업적 전시물이 되었고, 수많은 사진 속 노숙인들은 정치적 언어에 쓰이는 장식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종교는 더 이상 단순한 자비의 제스처만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구조를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탕 몇 개 던져주는 식의 활동이 아니라, 기득권을 내려놓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교황은 침묵과 청빈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청빈은 누구를 대신한 것입니까?

 

가난한 이들이 실질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지금, 교황의 샤워실은 그 의미를 잃습니다. 신앙은 상징이 아니라 책임이며, 구원은 이미지가 아니라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티칸은, 아직 단 한 번도 그것을 진정으로 실천하지 않았습니다.